빚 권하는 사회
<빚 권하는 사회>
#1.
때는 바야흐로 1996년인가 1995년.
근 1년간 매주마다 1000원씩 받던 용돈과 설명절 용돈을 모아보니 10여만원이었다. 부모님께 정기예금이라는 게 있다는 말을 듣고, 우체국에 가서 1년짜리 정기예금을 했더랬다. 내가 10만원을 우체국에 맡겨두고 1년이 지나면 9000원인가를 더 붙여서 나에게 준다니.... 문화 충격이었다. 지날 것 같지 않은 1년이 지나 우체국에 가보니 정말 거의 9~10%에 해당하는 금액이 더 붙어 있었다....
내가 저축의 기쁨을 처음 느껴본 날이자. 은행은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시발점이었다.
#2.
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정기예금 이후로, 종종 은행을 지나가다가 보이는 현수막이나 홍보물의 내용 중에 정기예금 몇%, 적금 몇% 따위의 '요즘 이자율'을 재미로 보면서 다녔더랬다.
이유인 즉슨, 이미 '이자소득'을 맛보고 나니 언젠간 또 한번 정기예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잡은 것이다.
참 신기하게도 1995,1996년 이후로 7,8%대의 은행 이자를 준다는 홍보물을 본 기억이 없다. 그리고 요즘 제1금융권 적기예금,적금 이자율은.... 2% 후반에서 잘 쳐주면 3% 초중반대이다. 2년 전에 했던 적금 이율이 4%대 중반이었으니, 1년에 0.5%씩 뚝뚝 떨어졌다고 보면 될까?
#3.
참 특이한 대출 상품이 하나 있다.
담보 없어도 된단다. 보증인 없어도 된단다. 1년간 고정금리로 해준단다. 고정수입이 있는지 여부도 필요 없단다.... 한달에 1원 한푼 안 벌어도 미래의 큰 가능성(?)을 보고 몇천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준단다.
웬만한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의대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인 이른바 의대생 마통이다. 말이 좋아서 마통이지 대출 상품이다. Loan이다. 빚이다.
#4.
요즘은 모르겠지만, 불과 몇년전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은행직원들이 학교까지 와서 대출 상품을 팔았다. 말 그대로 회사가 팔면 이익이 되는 '상품'을 팔러 온 것이다.
선배들은 종종 '미래의 너에게 좀 빌려 쓰렴. 은행에서 빌리는 게 아니고 너에게 빌린다는 개념으로 마통을 만들어 둬. 지금은 학생이라 그렇지만, 앞으로 몇년만 지나면 마이너스통장(대출) 몇백, 몇천 갚는 건 일도 아니야.'
라는 말을 해주셨다.
#5.
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...
http://news.search.naver.com/search.naver…
2009~2013년 서울고등법원 관할구역에 국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, 개인회생 신청 건수의 약40%는 의사/치과/한의사 였다.
#6.
의사/치과의사/한의사들이 병원/의원을 개원하겠다면 돈을 더 빌려준다. 1억 빌려준다는 '의사대출'이 담보나 보증만 있으면 몇억씩을 빌려준단다.
개원자금 빌려서 못 갚는 사람이 많은지 의대생이나 사회 초년생 의사들이 몇백 몇천 빌려쓰는 마이너스통장은 무담보, 무보증인데, 개원자금은 담보/보증이 필요하나 보다.
#7.
은행은 내 재산을 순순히 불려주고, 필요할 때 공짜로 돈을 빌려주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. 열심히 (대출) 상품을 팔아서 주식을 사서 보유하고 있는 주주들에게 이익을 내 주어야 하는 주식회사이고,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받아내는 채권자이다.
#8.
은행이 대출을 쉽게 내어준다는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.
- 채무자에게 대출을 해준다는 것을 '투자'라고 표현할 때, 투자대비 좋은 수익을 낼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고,
- 은행이 좋은 수익을 낸다는 것은, 원금상환기간이 꽤나 길어서 장기간 이자수익을 낼 수 있다는 의미이고,
- 채무자 시점(대출받은 사람)에서 말하면... 어떻게든 빚을 갚긴 갚아서 은행에게 수익을 안겨주긴 하지만, 빚을 쉽게 청산하지는 못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.
아마도 마이너스통장을 처음 만들 때의 머릿속에 있는 대출 상환 계획과는 달리 쉽게 안 갚아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.
#9.
빚 권하는 사회이다.
마이너스 통장 만들어 드립니다. 대출해서 집 사세요. 핸드폰 사세요(skt 할부금 연이율 연복리5.9%). 신용카드 하나 만드세요. 할부로 신차 사세요. 신용카드로 ATM에서 돈 뽑아 쓰는 현금서비스 이용하세요...
내가 구매하는 상품이 빚인지 아닌지도 헷갈릴 정도로 잘 포장되어 있는 게 많다.
#10.
빚 내기는 싫지만, 빚 없이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 세상이다.
국가도 빚이 많고, 회사들도 빚이 많고, 가계도 빚이 많다.
초저금리 시대에 수 많은 대출광고가 쏟아지지만, 언제 다시 금리가 치솟을지 모르는 이 시점에...
개인이나 가계의 자산 포트폴리오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.
머릿속에 있는 숫자들을 꺼내서 꼼꼼하게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.